미셸 블랑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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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. 개요
미셸 블랑(Michel Blanc)은 1974년 영화 배우로 데뷔하여, 프랑스 코미디 영화에서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하며 연기 경력을 쌓았다. 그는 1978년 영화 《레 브롱제(Les Bronzés)》에서 인기를 얻었으며, 이후 연극, 시나리오 작가, 영화 감독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. 1986년 영화 《정장(Tenue de soirée)》으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, 1994년 《큰 피로(Grosse Fatigue)》로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다. 2011년에는 영화 《장관(The Minister)》으로 세자르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등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 및 후보 지명 경력을 가지고 있다. 2024년 72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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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. 생애와 경력
미셸 블랑은 비교적 어려운 환경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자랐으며, 어릴 적 건강 문제로 부모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다.[2][3] 파스퇴르 고등학교 재학 시절 제라르 쥐뇨, 마리-안 샤젤, 크리스티앙 클라비에, 티에리 에르미트, 조지안 발라스코 등 훗날 프랑스 코미디 영화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동료 배우들을 만나 교류했고, 이는 르 스플렌디드(Le Splendid) 극단 창설로 이어졌다.[4][5][6]
블랑의 배우 경력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은 1978년 영화 선탠하는 사람들(Les Bronzés)에서 맡은 장-클로드 뒤스 역할이었다. 이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, 블랑은 이 역할로 인해 '매력 없는 실패자'라는 이미지에 갇힐 것을 우려하여 이후 앙드레 테시네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는 등 진지한 역할과 연극 무대를 통해 연기 영역을 넓히고자 노력했다.[7] 그는 언론에서 "슬픈 광대"로 불리기도 했으나, 스스로는 "걱정하는 광대"라고 정정했다.[7]
배우 활동 외에도 블랑은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했다. 1984년 영화 ''마르슈 알 롬브르''(Marche à l'ombre프랑스어)로 감독 데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,[9] 이후에도 꾸준히 영화 연출과 시나리오 작업을 병행했다.[7] 그는 소설이나 희곡을 각색할 때 원작의 스타일을 존중하면서도 자신만의 시각을 담아내는 신중한 작업 방식을 고수했다.[8] 또한, 닐 사이먼, 앨런 에이크번, 데이비드 헤어 등 여러 영미권 극작가들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각색하여 프랑스 연극계에 소개하는 역할도 했다.[10] 어린 시절부터 고전 음악 애호가였던 그는 에릭 탕귀의 모노드라마 초연에 참여하고 극작 텍스트를 집필하는 등 음악 관련 활동에도 참여했다.[11]
미셸 블랑은 칸 영화제에서 연기 부문(1986년 테뉘 드 쑤아레(Tenue de soirée)로 남우주연상)과 창작 부문(1994년 그로스 파티그(Grosse Fatigue)로 각본상) 모두에서 수상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.[12]
2. 1. 초기 생애와 교육
미셸 블랑은 이삿짐센터 직원인 아버지 마르셀과 타이피스트인 어머니 자닌 블랑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다.[2] 태어난 직후 심잡음이 발견되어 부모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.[3]파스퇴르 고등학교 재학 중 제라르 쥐뇨를 만나 친구가 되었고, 이는 훗날 배우 동료로 이어지는 인연이 되었다.[4][5] 같은 시기에 마리-안 샤젤, 크리스티앙 클라비에, 티에리 에르미트, 조지안 발라스코와도 교류했는데, 이들은 나중에 함께 ''르 스플렌디드'' 극단을 창단하는 핵심 멤버가 된다.[6]
2. 2. 연기 경력
파스퇴르 고등학교(Lycée Pasteur) 재학 중 제라르 쥐뇨를 만나 친구가 되었고, 같은 시기에 마리-안 샤젤(Marie-Anne Chazel), 크리스티앙 클라비에(Christian Clavier), 티에리 에르미트(Thierry Lhermitte), 조지안 발라스코(Josiane Balasko) 등과 교류하며 훗날 르 스플렌디드(Le Splendid) 극단을 결성하는 기반을 마련했다.[4][5][6]블랑의 배우 인생에 전환점이 된 작품은 1978년 코미디 영화 선탠하는 사람들(Les Bronzés)이다. 이 영화는 코트디부아르 휴양지에서 로맨스를 찾는 프랑스 휴가객들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며, 블랑은 여성 유혹에 번번이 실패하는 어색한 독신남 장-클로드 뒤스(Jean-Claude Dusse) 역을 맡아 큰 인기를 얻었다. 그러나 그는 이어진 두 편의 속편 이후 '매력 없는 실패자'라는 이미지에 갇힐 것을 우려했다.[7]
이후 블랑은 앙드레 테시네(André Téchiné) 감독의 영화 등에 출연하며 진지한 역할을 소화하고, 연극 무대에 서는 등 연기 영역을 넓히기 위해 노력했다.[7] 그는 언론에서 때때로 "슬픈 광대"로 묘사되기도 했지만, 스스로는 이를 부정하며 프랑스 언론 및 문화 잡지 텔레라마(Télérama)와의 인터뷰에서 "나는 슬픈 광대가 아니라, 걱정하는 광대"라고 밝히기도 했다.[7]
1986년에는 영화 이브닝 드레스(Tenue de soirée)에서 안투안 역을 맡아 1986년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밥 호스킨스(Bob Hoskins)와 공동으로 수상했다.[12] 2011년에는 영화 미니스터(L'Exercice de l'État)에서의 연기로 세자르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.
=== 주요 출연작 ===
- ''Attention les yeux !'' (1976)
- 가장 잘 걷는 법 (1976, ''La Meilleure Façon de marcher'')
- 애욕 (1976, ''Je t'aime moi non plus'')
- 테넌트 (1976, ''Le Locataire'')
- ''On aura tout vu'' (1976)
- ''Des enfants gâtés'' (1977)
- ''Le diable dans la boîte'' (1977)
- 선탠하는 사람들 (1978, ''Les Bronzés'')
- * 선탠하는 사람들 스키타다 (1979, ''Les Bronzés font du ski'')
- * 선탠하는 사람들 3 - 인생의 친구들 (2006, ''Les Bronzés 3: Amis pour la vie'')
- 사춘기 소녀 (1979, ''L'Adolescente'')
- ''Le père Noël est une ordure'' (1982)
- 프랑과 달러 (1984, ''Marche à l'ombre'') - 연출, 각본, 출연
- 이브닝 드레스 (1986, ''Tenue de soirée'')
- 은행털이와 아빠와 나 (1986)
- 살인 혐의 (1989) - 이르 역
- ''Uranus'' (1990)
- 감사한 삶 (1991, ''Merci la vie'')
- 프로스페로의 서재 (1991, ''Prospero's Books'')
- 중독된 사랑 (1993, ''Toxic Affair'')
- 엄청난 피곤 (1994) - 연출, 각본, 출연
- 미스터 몬스터 (1994)
- 패션쇼 (1994)
- 당신이 원하는 이에게 키스하세요 (2002, ''Embrassez qui vous voudrez'') - 연출, 각본, 출연
- 미남이시네요 (2005, ''Je vous trouve très beau'') - 에메 역
- 증인 (2007, ''Les Témoins'')
- 두 번째 숨결 (2007)
- 더 걸 온 더 트레인 (2009, ''La Fille du RER'')
- 스팟 오브 바더 (2009, ''Une petite zone de turbulences'')
- 미니스터 (2010, ''L'Exercice de l'État'') - 질 역
- ''Et soudain, tout le monde me manque'' (2011) - 엘리 드레이 역
- ''Demi-sœur'' (2013)
- 로맨틱 레시피 (2014)
- ''Les Souvenirs'' (2014) - 로맹의 아버지 역
- 알라딘: 바그다드 스캔들 (2014, ''Les Nouvelles Aventures d'Aladin'')
- 오드 잡 (2016, ''Un petit boulot'')
- 레드 댕그 (2017, ''Raid dingue'')
=== 연극 출연 ===
2. 3. 연출 및 각본 경력
미셸 블랑은 1984년 코미디 영화 ''마르슈 알 롬브르''(Marche à l'ombre프랑스어)로 감독 데뷔를 했다. 이 영화는 제라르 랑방(Gérard Lanvin)과 함께 주연을 맡았으며, 블랑이 직접 각본도 썼다. 날카로운 대사와 주연 배우들의 조화로 그해 6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.[9]그는 이후에도 여러 영화의 연출과 각본을 맡으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. 주요 연출 및 각본 참여 작품은 다음과 같다.
블랑은 시나리오 작가로서 1978년 ''레 브롱제''(Les Bronzés)부터 2016년 ''앙 쁘띠 부욜''(Un petit boulot)까지 꾸준히 활동했다.[7] 그는 2009년 영화 ''앙 쁘띠 존 드 튀르뷜랑스''(Une petite zone de turbulences)의 감독직은 거절했지만, 시나리오 작업과 주연은 맡았다.[8]
작가로서의 작업 방식에 대해 블랑은 소설이나 텍스트를 각색할 때 원작의 스타일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밝혔다. 그는 "항상 같은 방식으로 작업합니다. 글을 쓰고, 3주 동안 그대로 둔 후 다시 작업합니다. 그 시점에서는 더 이상 각색하는 책이 아니라 제 각본입니다."라고 설명하며, ''A Spot of Bother''의 경우 다섯 번의 수정 작업을 거쳤다고 덧붙였다.[8]
또한 블랑은 다수의 영어 연극을 프랑스 무대에 맞게 번역하고 각색하는 작업에도 참여했다.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닐 사이먼(Neil Simon)의 ''I ought to be in pictures''(프랑스어 제목: ''Je veux faire du cinéma'', 1992), 앨런 에이크번(Alan Ayckbourn)의 ''커뮤니케이팅 도어스''(Communicating Doors)(프랑스어 제목: ''Temps variable en soirée'', 1996), 레이 쿠니(Ray Cooney)의 ''Funny money''(프랑스어 제목: ''Espèces menacées'', 1997), 데이비드 헤어(David Hare)의 ''더 블루 룸''(The Blue Room)(프랑스어 제목: ''La Chambre bleue'', 1999), 어니스트 톰슨(Ernest Thompson)의 ''웨스트 사이드 왈츠''(The West Side Waltz)(프랑스어 제목: ''La Valse à Manhattan'', 2001), 앨런 에이크번의 ''Things we do for love''(프랑스어 제목: ''L'amour est enfant de salaud'', 2003), 테렌스 맥널리(Terrence McNally)의 ''프랭키 앤 조니 인 더 클레어 드 뤼느''(Frankie and Johnny in the Clair de Lune)(프랑스어 제목: ''Frankie et Johnny au clair de lune'', 2004), 모리스 파니치(Morris Panych)의 ''Vigil''(프랑스어 제목: ''Tantine et moi'', 2005) 등이 있다.[10]
고전 음악 애호가이기도 한 그는 음악 관련 창작 활동에도 참여했다. 2004년 파리에서 브르타뉴 국립 오케스트라(Orchestre National de Bretagne)와 협연하여 에릭 탕귀(Eric Tanguy)의 모노드라마 ''세네크, 데르니에 주르''(Sénèque, dernier jour) 초연 무대에 올랐다. 또한 2013-2014 시즌 뷔프 뒤 노르 극장(Théâtre des Bouffes du Nord)에서 초연된 탕귀의 극작 ''포토 덩팡 아베크 윈 트롱펫''(Photo d’un enfant avec une trompette)의 텍스트를 집필하기도 했다.[11]
블랑은 1994년 영화 ''그로스 파티그''(Grosse Fatigue)로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며 연출 및 각본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다.[12] 이는 1986년 ''테뉘 드 쑤아레''(Tenue de Soirée)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데 이은 것으로, 그는 칸 영화제에서 연기와 창작 부문 모두에서 수상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.[12]
2. 4. 연극 활동
미셸 블랑은 파스퇴르 고등학교(Lycée Pasteur) 재학 시절 제라르 쥐뇨를 만나 친구가 되었고, 같은 시기에 마리-안 샤젤(Marie-Anne Chazel), 크리스티앙 클라비에(Christian Clavier), 티에리 에르미트(Thierry Lhermitte), 조지안 발라스코(Josiane Balasko) 등과 교류했다.[4][5] 이들은 훗날 르 스플렌디드(Le Splendid) 극단을 결성하여 함께 활동하게 된다.[6]블랑은 배우로서 다수의 연극에 출연했으며, 일부 작품에서는 연출을 맡기도 했다. 또한, 여러 영어권 희곡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각색하여 프랑스 무대에 올리는 데 기여했다.
=== 배우 활동 ===
